• 2023. 4. 29.

    by. 목장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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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즈는 소, 염소, 양,  물소와 같은 포유동물에서 얻은 젖을 응고시켜 만든 식품입니다.    

      와인, 빵과 잘 어울리는 치즈.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어원과 역사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치즈의 어원

      치즈는 영어인 'cheese'를 그대로 우리말처럼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치즈라는 말은 치즈를 뜻하는 라틴어 '카세우스caseus'로부터 유래된 말로 독일어 '케제 kase', 이탈리아어 '카초 cacio', 스페인어 '케소 queso'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영어인 'case'와 중세영어인 'chese'를 거쳐 'cheese'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어 '포르모스 formos'(그리스인들이 치즈를 만들 때 유청을 제거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바구니)에서 이탈리아어 '포르마찌오 formaggio', 프랑스어 '프로마주 fromage'가 유래되었습니다. 

     

    치즈의 역사

      우리가 언제부터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것은 1만여 년 전 야생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사육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치즈를 최초로 처음 만든 사람들은 놀랍게도 유럽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이 최초로 가축을 사육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유목민들이 풀을 찾아 이동할 때 양(羊)의 위(胃)로 만든 주머니를 가지고 다녔는데, 여기에 담은 양의 젖이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서 산성화가 이루어졌고,  위에 잔존하던 효소인 렌닌(rennin: 우유를 응고시키는 역할을 하는 효소)에 의해서 응고되어 유청으로 분리되었다는 이야기가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 최초의 치즈인 자연적인 발효에 의한 프레시 치즈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을 식품화하는 과정과 식품으로 먹기 위해 제조를 하기 시작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치즈를 만드는 목적 중 하나는 육류를 건조하거나 염장하고, 과일과 채소, 곡류 등을 발효하거나 건조하여 저장식품을 만드는 것처럼 남은 우유를 저장해 저장식품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유적들을 통해서도 치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치즈에 대한 최초의 문서 기록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고대 주민인 수메르인들이 작성한 점토판 문서에 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2천5백~3천년 전에 설형문자를 사용해 여러 가지 치즈의 생산량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또한 이집트의 첫 번째 왕조인 호루스-아하(Horus-aha: 2대왕, 기원전 2천8백~3천 년)의 고분에서 치즈 제조 용기로 보이는 토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치즈에 대한 더 확실한 흔적은 고대 이집트의 두 번째 파라오의 무덤(기원전 2800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무덤에서 발굴된 그릇들에 남아 있는 음식물들이 치즈로 판명된 것입니다. 또한 테베 근처의 한 무덤에서도 식탁에서 프레시 치즈를 나르고 있는 노예들의 프레스코화가 발견된 바 있습니다. 

      치즈 제조의 기술은 구약성서를 포함한 고대 문학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 <오딧세이>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동굴에 숨은 율리시즈가 시칠리아 섬에 살던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Cyclops)가 면양과 산양의 젖을 짜서 응고시키고, 유청을 따라낸 후, 버드나무 잔가지로 만든 바구니에 담아두는 것을 보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 그리스 로마 시대인 기원 후 60~65년경 농업 저술가인 코루멜라(Corumella)는 어린양의 위에서 추출한 응유효소를 사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렌닌 및 식물성 응고제에 대해 서술했으며,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치즈에는 우유의 중요한 성분만 남아있어 영양이 풍부하고 지방이 풍부하여 충분한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플라톤 역시 치즈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고대 올림픽 대회에 출전한 운동선수들은 치즈를 올리브유, 밀가루, 과일, 꿀과 섞어먹으며 영양을 보충했다고 합니다.   

      하드 치즈의 제조방법을 완성한 것은 고대 로마인들입니다. 그들은 그 기술을 유럽에 전파했습니다. 생젖을 싫어했던 로마인들은 염소젖, 양젖으로 치즈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때 응고제로는 무화과즙을 사용했습니다. 레닌을 사용하게 되면서 치즈 제조기술은 더욱더 발전해 기원전 1세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치즈가 만들어졌습니다. 로마인들은 하루의 두 끼를 치즈를 이용한 요리를 했습니다. 그만큼 치즈를 좋아했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빵이나 와인, 소금과 함께 치즈를 식량으로 받았습니다. 저장과 이동이 편리한 하드 치즈는 로마 병사들의 중요한 식량 중 하나였습니다. 하드 치즈의 제조기술은 로마제국이 번성함에 따라 병사들과 함께 이동해 이웃나라에 전파되었습니다. 기원전 400년경에 스위스, 영국, 프랑스에 하드 치즈 제조기술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로마 병사였습니다. 고대 로마의 작가 플라우토는 그의 희곡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애칭으로 '나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치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로마제국이 붕괴되고 유럽은 노르만, 몽고, 사라센과 같은 주변 민족의 침범과 페스트 같은 전염병으로 암흑기를 맞게 됩니다. 이 때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전통적인 치즈 제조기술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수도승의 활약으로 지방의 기후조건에 적합한 치즈 제조법이 단계별로 자세하게 기록되기 시작하여, 수도원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 전통적인 치즈 제조기술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시간단위나 온도단위 등이 완성되지 못한 시기여서, '단단해질 때까지' '과열되지 않도록' 등의 경험적인 표현으로 기록되고 전수되었습니다. 이렇게 수도원에서 만들어졌던 치즈로 오늘날까지 유명한 치즈에는 웬즐리데일(Wensleydale, 영국)이나 테트 드 무안(Tete de Moine, 스위스) 등이 있습니다. 포르 살뤼(Port-Salut)나 마르왈(Maroilles) 같은 유명한 프랑스 치즈들은 처음 만들어졌던 수도원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수도원의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했던 치즈 제조기술은 비밀로 유지된 적도 있지만, 수도승들은 인근 농민들에게 알려줘 오늘날 치즈의 뿌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문학, 예술,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때 치즈 제조와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등장했는데, 도시의 발달로 시장이 형성되고 시민의 필요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치즈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세까지는 가정이나 작은 마을 단위로 생산하던 치즈가 상업화가 된 것입니다. 이 당시의 치즈는 외피에 기름칠을 하거나 반질반질하게 깎아 모양이 좋아 보이도록 해서 상품가치를 높였습니다. 보통 6~8개월 이상 숙성시킨 치즈가 주로 판매되었고, 2~3년 숙성시킨 치즈는 최고급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근대에 접어들고 기계의 발명과 학문의 발달로 치즈산업은 더욱더 발전하게 됩니다. 1700년대에 현미경이 발명되었고, 이에 따라 미생물학이 크게 진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치즈 제조기술도 발전하게 됩니다. 1800년대 중반에는 우유를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는 기계가 도입되었습니다. 또한 냉장고가 발명되었고, 파스퇴르가 저온살균법을 개발해 치즈가 대량생한 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모든 치즈는 살균하지 않은 생유로 만들어졌습니다. 생유에는 많은 미생물이 있기 때문에 쉽게 상해 치즈를 대량생산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또한 1877년에는 스위덴의 한 기술자가 원심분리기를 개발하여 탈지유를 얻는데 시간과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치즈의 공업적인 생산은 1851년 윌리엄스가 미국의 뉴욕주에 소규모 체다 치즈 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공장 생산은 1870년경 덴마크의 한샘이 정제 레닌을 생산해 시판하면서부터 활성화되었습니다. 가공치즈는 1911년 스위스에서 최초로 개발되었지만, 유럽에서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16년 미국 크래프트사가 제조한 이래 수요가 늘기 시작했고, 오늘날 치즈 생산량의 80%이상을 가공치즈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전통 치즈를 보호하기 위해서 원산지 보증인증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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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치즈

      1931년 벨기에에서 출생한 디디에르 세르반테스(Diddier Servantes)는 고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부가 되기 위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아프리카와 한국 선교의 갈림길에서 한국행을 선택한 디디에르 신부는 1957년 한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인 임실군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가난한 지역민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자 당시 지역민들이 소규모로 사육하고 있던 산양의 젖을 이용해 어떻게 하면 수익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치즈를 만들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디디에르 신부도 치즈를 먹어보기만 했지 만들어 본 적은 없었기에, 먹을 줄만 알고 만드는 방법은 알지 못했습니다. 반복적인 실패 끝에 가족과 친지들의 도움으로 유럽으로 되돌아간 디디에르 신부는 프랑스의 포르 뒤 살뤼(Port du Salut), 까망베르(Camembert) 등의 치즈 제조기술을 연수하고 돌아옵니다. 이때 응유효소인 레닌(rennet: 송아지, 양의 위에서 발견되는 효소로 치즈를 만들 때 우유를 응고시키는 역할을 함)에 대한 지식도 알게 됩니다.

      디디에르 신부는 1967년 당시 보잘 것 없는 시설을 갖추고 지역 낙농가들과 함께 치즈제조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치즈를 제조하게 된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조한 치즈를 판매할 곳이 없어 지역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는데 마침 외국인이 머물던 서울의 한 호텔에서 품질 테스트를 거쳐 처음으로 생산주문을 받게 됩니다. 첫 주문량은 3,125kg 정도로 임실치즈의 생산시설로는 생산하기 벅찬 양이었습니다. 1976년 피자치즈 품질테스트에 합격한 임실치즈가 판매되기 시작한 지 어언 30년, 임실치즈는 치즈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한국의 대표 치즈생산업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임실 치즈 피자매장만 떠올려도 임실치즈가 한국의 대표 치즈생산업체라고 납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67년 임실치즈가 디디에르 신부의 도움으로 처음 생산한 치즈의 종류는 프랑스 치즈인 포르 뒤 샬뤼, 까망베르와 체다(Cheddar), 모차렐라(Mozzarella)등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 1974년 서울우유협동조합에서 체다 치즈를 본격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국내 처음으로 삼양유업(현 대관령우유)에서 가공치즈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1984년에는 모차렐라를 피자치즈의 형태로 생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7년과 1989년엔 해태유업에서 미군 PX치즈와 같은 형태인 GBM 방식의 낱개포장 슬라이스 가공치즈를, 남양유업에서 Natec 식 낱개포장 슬라이스 가공치즈를 생산하면서 본격적인 치즈 소비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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